강경발효젓갈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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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발효젓갈의 발달 배경 및 지역여건 

발달배경

- 강경은 금강의 중류와 하류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강경천과 논산천이 본류와 합류하는 지역으로서 수륙 간 교통의 요로에 해당되고 수운이 잘 발달되어진 천혜의 내륙항인 강경포구가 존재하여 일찍부터 금강하구의 관문으로 서해에서 들어오는 각종의 해산물과 국내외 교역 물품들이 이곳에 들어와 전국 각지로 팔려나갔던 역사 깊은 수산업 집산기지였음.

 

- 조선중기 무렵 제주에서 미역과 고구마, 좁쌀 등을 실은 배들이 강경포구로 드나들고, 중국의 무역선들이 비단과 소금을 싣고 들어와 장삿길을 트기 시작한 이래 조선후기에 포구 주인층인 객주(客主)와 여각(旅閣)이 등장하면서 강경은 수산물 최대시장으로 발전하고 일제가 경제수탈전진기지로 삼으면서 최고의 번성기를 맞음.

 

- 강경포구가 조선후기 3대시장의 하나로 수산물 집하장으로서의 본격적인 역할을 시작한 것은 구한말 돈이 많은 객주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으로 철저한 객주 중심 체제를 유지하여 전국 각지의 상인들로부터 돈을 모아 출어자금을 대어주고 잡은 고기를 판매하여 구전을 받아 상권을 확장.

 

객주들은 한사람이 수십 명씩 수산물 도매상인들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뱃사람들까지 일을 시켜 자연히 강경수산물시장은 객주중심으로 발전 함. 이 당시 강경에는 10여척씩 부리는 객주들이 20여명이나 있었다고 전해지며, 해마다 성어기인 봄과 가을 철 동안 강경포구는 전국에서 가장 생기 있는 장시가 열려 충남을 비롯하여 충북, 전북, 경기 등지의 이름있는 상인들은 생선, 건어물 등을 사기위해 강경으로 몰려들어 최대 거주인구가 3만명이었고 상인들의 유동인구까지 합치면 10만인구로 여각마다 초만원을 이루었음.

 

- 이 무렵의 어업은 조그만 범선을 이용한 근해조업이어서 서해의 고군산 열도가 최대어장이었고 여기서 잡은 어류들이 금강을 타고 강경으로 들어왔는데 조기와 갈치는 전국의 수요가 전부 이곳으로 입하되었고, 민어, 홍어, 게, 전갱이, 새우젓 등 서해에서 잡은 어류들은 모두 강경을 통해서 소비지로 팔려나감.

 

- 이와 같이 강경은 수산물 집산 전진기지로서 변모를 갖추고 객주업으로 상당한 어업권을 확보하여 돈이 많았던 객주들은 전남 목포항 등 영세한 선주들에게 미리 돈을 주고 잡은 새우등의 90%이상을 사들여 서해안의 소금에 염장하여 전라도, 충청도 지방의 폐광된 굴속에 수많은 젓갈을 100일 이상 저장하여 발효시켰다가 전국의 도매상과 강경의 젓갈상인에게 판매했던 때부터 강경의 젓갈이 유래 발달된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음.

 

일례로 현재 강경젓갈단지 매장의 집합체인 강경읍 염천리(鹽川里)는 서해안의 소금을 싣고 와 이곳 창고에 보관하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임. 

 

【참고문헌 : 임대병,「강경의 젓갈문화 형성배경과 향후 발전방향 연구논문(건양대학교대학원, 2003)」외】